작가 평론

이선영_미술비평

홍지연의 작품은 민화의 모티프를 현대적이고 자의적으로 각색한다. 현대적이라 함은
전통적인 민화의 표현방식을 캔버스 위에 아크릴 물감으로 번역하면서 다양한 소재를
조합하는형식에 있고 자의적 이라함은 집단의 기억이 각인된 도상을 개인적 기억으로
대체함에 있다. 민화의 원색은 거의 형광 빛이 도는 강렬한 색감으로 변화 했는데, 이는
자연에서 추출된 상징적 색채가 도시적 환경이 제공하는 시각적 자극으로 대체되는
변화에 상응한다. 전시 부제인 는 기억이 가지는 불확정성과 불연속
성을 강조한다. 어느 박스를 열든, 어떻게 포장되었건 내용물을 꺼내보는 순서와 방식은
사전에 정해진바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기억은 꿈과 비슷해진다. 홍지연의 작품에서
전통은 정확한 재현의 대상이 아니라, 개인적인 감성과 취향에 의한 선택적 항목들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이 전통을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변형하는 것, 또는 그것의
잘못된 이해나 건망증의 산물은 아니다. 전통이라는 것이 정확하고 객관적인 원본을
가지고 있으며, 그 이후에 그것의 복사본들이 있을 뿐이라는 전제는 옳지 않다. 수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에 와서, 애초의 원본이라는 것도 수많은 단서 중의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료는 지금 우리의 기억과 마찬가지로 비어 있는 부분이 더 많고,
그런 점에서 우연적이다. 역사에 대한 선적 인과관계는 시간적 공백공포의 산물이며,
관념론적인 시나리오에 불과하다.
홍지연이 민화를 전용하는 방식은 객관적인 것을 주관화시켰다기보다는, 역사가 생성
되고 변형되는 과정을 한 개인의 감수성 속에서 압축적으로 재생한 것에 가깝다. 여기
에서는 차라리 역사적 흔적의 우연성과 예술적 해석의 필연성을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먼저 문자도의 전통에 따라 숫자나 문자를 이미지와 중첩시킨 작품
들이 보인다. 선명하게 칠해진 꽃송이들은 이미지와 문자를 이루는 조형적인 요소로
배치된다. 꽃의 화려함과 한시성은 불꽃이나 삶의 의미와 중첩된다. ‘boxing’으로
시작되는 제목이 붙은 시리즈에서는 구획된 공간을 관통하는 식물을 기본형으로 하여,
곤충이나 괴석 같은 소재를 곳곳에 배치한다. 구획된 공간은 각각의 맥락이 있었을
소재들의 병치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드는 효과를 준다. ‘박제’라는 키워드가 제목에
들어가는 작품들은 색동을 연상시키는 가로줄 패턴 사이에 소재들을 교차 배치했는데
이 또한 다양한 기원을 가지는 소재들을 한 공간에 모으는 방식이다. 바다의 패턴이
나오는 작품들에서 병치는 보다 역동적으로 이루어진다. 작품
에서는 거칠게 휘몰아치는 물결위에 이스터 섬의 조각상, 원앙새, 고래, 연꽃, 매 등이
제각각의 물마루를 타고 떠돈다. 전경의 육지에는 같은 기후대에서 서식할 수 없는
동물들이 곳곳에 배치된다. 지상의 문화적, 자연적 존재들은 역사의 대해(大海)와
고고학적 지층 속에서 명멸한다.
회색 물결은 퇴색한 시간의 흐름을 상징한다. 여기에서 시간은 카오스적으로 흐르며,
물마루를 타고 부유하는 것들을 역사의 대해 속에서 마구 뒤섞는다. 그밖에 한 줄기에서
여러 색의 꽃이 피고 붉은 달이 뜨는 식의 환상성이 극대화된 작품들과 외래종 견공과
전통 꽃의 모티프를 익살스럽게 결합시킨 작품 등이 있다. 환상과 익살은 전통, 역사,
회화 같은 다소간 무겁게 정의되는 방식들을 경쾌하게 재서술하는 수단이다. 홍지연의
작품에 등장하는 전통적 소재는 도상학에 충실하지 않다. 도상학이란 하나의 중심과
수렴이라는 동일자의 모델을 따르는 것으로, 예술보다는 형이상학이나 신화적인 것에
더욱 가까운 것이다. 전통이 계속 호출되지만 그것의 정확한 복사나 재현과는 거리가
있으며, 원본의 합법성을 벗어나는 요소가 두드러진다. 그것은 원본과 복사의 구별자체를
해체하는 시뮬라크르의 모델을 따른다. 팝아트에 대해 들뢰즈가 설명한 것처럼, 복사는
반복을 통해 그 본성을 바꾸어 시뮬라크르로 전환될 때까지 나아간다. 전통적 대상의
시뮬레이션에 대한 전략을 보여주는 홍지연의 작품은 인과관계를 무시하고 모든 것을
표면으로 띄워 올려 자유로운 놀이와 강렬한 환각성을 창출한다. 역사라는 카오스의
대해에서 모든 근거지움과 뿌리는 삼켜지고 와해된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
새로운 계열이 생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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